공방에서 하는 일이 표구만은 아닙니다. 요즘은 수첩도 만들고 있습니다. 전통 방식 그대로, 한 땀 한 땀 손으로 엮어가는 수첩입니다.
처음에는 표구 작업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시작했습니다. 표구도, 수첩 만들기도 결국 종이와 실과 풀을 다루는 일이니까요. 재료가 조금 달라졌을 뿐, 손이 움직이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통 방식은 그대로입니다
전통 방식의 수첩은 한지와 명주실로 만드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지 대신 크라프트지나 색지를 표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재료는 현대적이지만, 만드는 과정은 옛날 방식 그대로입니다.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재단하고, 속지를 겹겹이 접어 정리하고, 표지를 감싸고, 실로 꿰매는 모든 과정이 손으로 이루어집니다. 기계를 쓰지 않습니다. 빠르게 찍어낼 수도 없습니다. 한 권을 완성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게 이 작업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엠보싱도 직접 만듭니다
이 수첩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표지의 엠보싱 무늬입니다. 반복되는 작은 문양이 표지 전체에 고르게 찍혀 있는데, 이것도 도구를 이용해 한 장씩 만듭니다.
모양은 전통적으로는 능화판을 사용합니다. 능화판은 나무에 문양을 새겨 종이에 눌러 찍는 전통 도구로, 우리나라 고서의 표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능화문양이 바로 이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방법인 만큼 그 아름다움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능화판은 새겨진 문양이 고정되어 있어 다양한 무늬를 내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많은 능화판을 구입하면 좋지만 그러기엔 가격의 부담이 너무 큽니다. 가격 문제와 다양한 문양을 표현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선택한 방법이 지금의 방식입니다.
만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표지로 쓸 종이에 밀랍을 고르게 바릅니다. 밀랍을 바르면 종이 표면이 살짝 굳으면서 탄력이 생깁니다. 이 상태에서 문양이 새겨진 도구를 종이 위에 올리고 전체를 한 번에 눌러주면, 도구에 새겨진 문양이 종이 표면에 고르게 찍혀 나옵니다. 한 칸씩 따로 찍는 것이 아니라, 도구 하나로 표지 전면의 무늬가 한꺼번에 완성되는 방식입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과정에서도 손의 감각이 중요합니다. 밀랍을 얼마나 고르게 발랐는지, 누르는 힘이 전면에 균일하게 전달되는지에 따라 문양의 선명함이 달라집니다. 밀랍을 바른 종이는 표면에 은은한 윤기가 돌고 손에 닿는 감촉도 달라집니다. 이 질감이 완성된 수첩을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재단에서 시작합니다
수첩 만들기는 종이 재단에서 시작합니다. 표지와 속지를 원하는 크기에 맞게 정확하게 자르는 것이 첫 번째 작업입니다. 표구에서 배접지를 재단할 때와 마찬가지로, 1밀리미터의 오차도 완성품의 균형에 영향을 미칩니다. 칼과 자를 잡는 손의 감각은 오랜 표구 작업으로 이미 익숙해진 것들입니다.
속지는 여러 장을 겹쳐 접은 뒤 순서에 맞게 정리합니다. 이 과정이 흐트러지면 나중에 페이지가 뒤섞이거나 책등이 고르지 않게 됩니다. 작은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것, 그것이 수작업의 기본입니다.
실로 엮는 시간 — 오침안정법
재단이 끝나면 실로 엮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이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입니다.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실로 엮어 나가는 전통 제책 방식으로, 조선 시대 서책을 만들 때 사용하던 방법 그대로입니다. 재료는 달라졌지만 이 엮음 방식만큼은 전통을 그대로 따릅니다.
바늘에 실을 꿰어 미리 뚫어둔 다섯 개의 구멍을 따라 정해진 순서대로 한 땀 한 땀 꿰매어 갑니다. 구멍의 간격과 순서가 정확해야 책등이 고르게 마무리됩니다. 이 작업이 수첩 만들기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단계이기도 하고, 가장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의 장력이 고르지 않으면 책등이 울거나 나중에 실이 풀릴 수 있습니다. 너무 강하게 당기면 종이가 찢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엮음이 헐거워집니다. 표구에서 배접지를 붙일 때 힘 조절이 중요하듯, 실을 엮을 때도 손목의 감각이 결과를 좌우합니다.
실 색깔도 하나하나 고릅니다. 크라프트 표지에는 짙은 청록색 실을, 초록 표지에는 붉은 실을 엮어 포인트를 주기도 합니다. 표지 색과 실 색의 조합을 고르는 일도 이 작업의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술 장식으로 마무리합니다
실 엮음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술 장식을 답니다. 책등 상단에 작은 술을 달아주면 수첩이 한결 단정하고 고급스러워집니다. 전통 서책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짙은 청록색 술 하나가 달리면, 단순해 보이던 크라프트 표지 수첩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냅니다. 작은 디테일이 전체의 인상을 바꾼다는 것, 표구 작업에서도 늘 느끼는 점입니다.
표구와 다르지 않습니다
수첩 만들기가 표구와 동떨어진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두 가지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료를 고르고, 정확하게 재단하고, 밀랍으로 무늬를 내고, 오침안정법으로 실을 엮고, 세심하게 마무리하는 과정. 표구도, 수첩 만들기도 이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손의 감각, 서두르지 않고 한 단계씩 완성해 가는 방식, 그리고 완성되었을 때의 그 묵직한 만족감까지.
재료는 달라졌지만, 손이 기억하는 것들은 여전히 같습니다. 오늘도 공방에서 한 권의 수첩이 천천히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